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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점, 그리고 어제의 주막

기록으로 보는 주막

기사작성 01-29 리쿼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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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官 주도로 주점 세워
조선시대 때 번성… 곳곳에 주막村
개화기 이후엔 목로주점 등 생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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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음식점이나 주점은 옛날로 치면 주막에 가깝다. 서민들은 이곳에서 밥과 술을 시켜 먹었고, 때로 잠을 자기도 했다. 사진은 경북 예천에 있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의 모습.

 

 

먹고살기 빠듯한 지금에도 도시의 밤은 화려하다. 술집, 밥집은 넘치고도 넘친다. 우린 먹고 싶은 요리와 술을 시키고 그 값을 지불한다. 음식을 먹는 곳은 음식점, 술을 마시는 곳은 주점(酒店)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배고픔을 채우고 반가운 얼굴에 기분이 좋아지며 잠시 화났던 마음을 씻는다. 때로 생각지 못했던 만남이 이뤄지기도 한다. 낭보(朗報)를 전해 들으며 비보(悲報)를 전하기도 한다. 그 같은 일들이야 어찌 요즘에만 그럴까.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곳이 있었고, 그 공간의 역할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사람들은 그곳을 ‘주막(酒幕)’이라고 부른다. 그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흔히 집에서 술을 빚어 마셨다. 가양주(家釀酒)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그 술은 이웃과 나누는데도 쓰였다. 그 때문인지 돈을 받고 술을 내어주는 가게는 일찍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전해 내려오는 설(說)에 의하면 신라의 김유신과 천관(天官)이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의 직업이 술을 파는 기녀(妓女)였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선덕여왕 때인 6세기 중반 무렵에는 화랑(花郞)을 비롯한 귀족이 드나드는 고급 술집이 있었다는 얘기다. 

 

고려시대 때부터는 주점에 관한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7대 왕 성종(成宗) 때 개경(開京)에 주점을 여러 곳 두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숙종 7(1102년)년에는 금속화폐인 해동통보(海東通寶)의 유통을 장려하기 위해 관(官) 주도로 주점을 세웠고 주(州)·현(縣) 단위로 주식점(酒食店)을 개설했다. 이 시대에는 사찰에서도 술을 빚어 팔았다. 거기에다 숙박업과 주류 소매까지 겸하는 사찰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기록들로 볼 때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주막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서의 양조와 판매를 제외한 주점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조선시대로 넘어갔다.

 

조선 선조(宣祖) 때 윤국형(尹國馨)이 쓴《문소만록(聞韶漫錄)》에는“호남과 영남의 큰길가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술과 장작만 있을 뿐이었다. 여행자는 식량과 여행 필수품을 말에 싣고 가다가 이 주막을 만나면 자기가 갖고 있는 쌀로 밥을 지어먹고 술을 마신 후 주인에게 술과 나무 값을 쌀이나 필목(疋木)으로 치렀다”고 적혀있다. 효종 때에는 화폐가 점차 활발히 유통되면서 음식도 팔고 접대하는 여자도 있는 주막이 생겨났다.

 

조선시대의 주막은 고려시대 못지않게 꽤나 번성했다. 주막은 한양(漢陽)에서 인천으로 가는 곳, 즉 지금의 오류동이나 소사 지역에 많았다. 한양에서 인천으로 갈 경우 점심쯤 이곳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천에서 한양으로 들어갈 때도 이곳에서 허기를 달랬다. 또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문경새재에도 주막촌(村)이 형성돼 있었고, 호남과 영남의 길목인 화개장터, 한지(韓紙)와 농산물의 집산지였던 전주, 천안삼거리에도 주막이 넘쳐났다.

 

조선시대의 주막은 구조적인 특징이 있다. 주모(酒母)가 부엌에서 앉은 채로 술이나 국을 떠 손님에게 줄 수 있도록 돼 있다. 부엌이 방이나 마루와 밀착돼 있어 가능한 일이다. 우리 시대 마지막 주막으로 알려진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三江酒幕)’에 가보면 이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조선시대의 주막에서 주로 팔았던 술은 탁주(濁酒)다. 그러나 원하는 사람에게 팔기 위해 소주나 약주(藥酒)를 준비해두는 곳도 있었고, 돈 많은 양반들에겐 고급술을 팔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벤트성으로‘잔술’을 팔지만 당시에도 술을 한두 잔씩 팔았다. 술 한 잔에 공짜 안주 한 점씩 얹어주는 형태였다.

 

조선시대의 주막은 이용자들에게 술과 밥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해주며, 여러 사람에게서 최신 정보를 얻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기존 주막과 다른 형태의 내외주점(內外酒店), 모주가(母酒家), 목로주점(木爐酒店)이 생겨났다. 이들은 술을 전문으로 파는 주점이었는데, 주로 서민이나 가난한 양반들이 찾았다. 내외주점은 몰락한 양반집 아낙들 가운데 용기 있는 여자들이 술장사를 하던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철저히 예의를 지켜가며 술을 팔았다. 주인과 손님은 대면(對面)이나 직접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따라서 손님과의 소통은 이곳에서 일하는 소년이나 환갑이 가까운 노파들이 맡았다. 모주가는 막벌이꾼이나 인부들이 많이 이용했다. 개화기를 전후로 생겨난 목로주점은 좁고 긴 나무판자를 술상으로 해서 여러 사람이 선 채로 마주보고 잔술을 마시던 선술집이었다. 이곳에선 안주를 따로 팔지 않았다. 술 한 잔에 한 점씩의 안주를 끼워 함께 술값을 매겼다. 전통 주막처럼 술을 직접 빚지 않았던 목로주점은 술 소비가 많아지자 헌주가(獻酒家)에서 술을 공급받았다. 헌주가는 술의 대량생산과 공급을 전문으로 한, 지금의 양조장 같은 곳이다.

참고자료 전통주조백년사(배다리술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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